내가 해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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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Paul Graham, "What I Worked On"

대학에 입학하기 전 학교 공부 외에 주로 했던 일은 글쓰기와 프로그래밍이었습니다. 에세이는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그리고 아마 지금도 초보 작가들이 주로 집필하는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제 소설은 형편없었습니다. 플롯은 거의 없었고 그저 강렬한 감정을 지닌 인물들만 등장했습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생각했거든요.

첫 프로그램은 우리 교육구에서 당시 “데이터 처리(data processing)”라 불리던 작업을 위해 사용하던 IBM 1401로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9학년이었으니 13살이나 14살 무렵이었겠네요. 교육구의 1401은 마침 우리 중학교 지하실에 있었고 친구 리치 드레이브스(Rich Draves)와 저는 사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지하실은 마치 007 시리즈 악당의 작은 아지트 같았습니다. 이중 바닥 위에 CPU, 디스크 드라이브, 프린터, 카드 리더기 같은 생경한 기계들이 밝은 형광등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했던 언어는 초기 버전의 포트란(Fortran)이었습니다. 펀치 카드에 프로그램을 작성한 한 후 카드 리더기에 순서대로 쌓아 넣습니다. 그러고 나서 버튼을 눌러 메모리에 프로그램을 로드한 후 실행시켜야 했습니다. 실행 결과는 대개 엄청나게 시끄러운 프린터에서 무언가가 출력되는 것이었습니다.

1401은 난해했습니다.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펀치 카드에 저장된 데이터 형식으로만 프로그램에 입력이 가능했는데 제게는 펀치 카드 데이터가 없었습니다. 다른 방식이라고는 파이(π)의 근삿값을 계산하는 것과 같이 아무 입력도 요하지 않는 작업 정도였습니다만 그런 흥미로운 계산을 할 정도의 수학적 지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작성했던 프로그램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별 의미 없는 프로그램이었을 테니까요. 가장 선명한 기억은 프로그램이 종료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던 순간입니다. 제가 작성한 프로그램 중 하나가 종료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거든요. 시분할 시스템이 없는 기계에서 프로그램이 종료되지 않는 것은 기술적인 오류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오류였습니다. 데이터 센터 관리자의 표정을 보니 그 사실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마이크로컴퓨터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컴퓨터를 책상에 두고 바로 앞에 앉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펀치 카드 뭉치를 처리하고 나서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행 중에도 사용자의 키 입력에 즉시 반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제 친구들 중 가장 먼저 마이크로컴퓨터를 갖게 된 친구는 조립을 직접 했습니다. 히스킷(Heathkit)에서 판매하던 키트였죠. 그 친구가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램을 바로 입력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컴퓨터는 매우 비쌌고 아버지를 설득해 한 대를 사기까지 수년간 졸라야 했습니다. 결국 1980년쯤 TRS-80을 사주셨습니다. 그 시절 최고 사양은 애플 II였지만 TRS-80도 충분히 괜찮은 기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밍을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게임부터 모형 로켓이 얼마나 높이 날 수 있을지 예측하는 프로그램, 그리고 아버지께서 적어도 한 권의 책을 집필하는 만큼 사용하신 워드 프로세서를 만들었습니다. 메모리에는 약 2페이지 분량의 텍스트만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2페이지씩 작성하고 인쇄해야 했지만 그래도 타자기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프로그래밍을 좋아하긴 했지만 대학에서 전공할 계획은 없었습니다.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철학을 전공할 생각이었습니다. 순진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제게는 철학이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였고 다른 분야의 지식은 그저 부분적인 전문 지식에 불과하다고 느꼈습니다. 막상 대학에 가서 보니 다른 분야들이 사상의 영역을 너무 많이 차지한 나머지, 이른바 궁극적인 진리라는 것을 탐구할 만한 여지가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철학에 남겨진 것은 다른 분야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간과되는 극단적인 사례들뿐이었습니다.

18살 때는 이런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철학 수업을 계속 들으면서 지루하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인공지능(AI)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AI는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로 하여금 AI를 공부하고 싶어 지게 만든 두 가지 계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는 로버트 A.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의 소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The Moon is a Harsh Mistress)』이었는데 이 작품에 마이크(Mike)라는 지능형 컴퓨터가 등장합니다. 또 하나는 PBS 다큐멘터리에서 테리 위노그라드(Terry Winograd)가 SHRDLU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것이었습니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다시 읽어본 적은 없어서 여전히 훌륭하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마이크같은 지능형 컴퓨터의 등장은 이제 시간문제인 듯했습니다. 그리고 위노그라드가 SHRDLU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 시간이 기껏해야 몇 년 남았을 뿐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SHRDLU에게 더 많은 단어를 가르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당시 코넬대학교에는 AI 관련 강의가 전혀 없었고 심지어 대학원 수준의 강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학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Lisp이 AI의 언어로 여겨졌기 때문에 Lisp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널리 쓰이던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상당히 원시적이었고 그에 따른 프로그래머들의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코넬의 기본 프로그래밍 언어는 PL/I이라는 파스칼(Pascal)과 유사한 언어였으며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Lisp을 배우면서 프로그래밍에 대한 개념이 아주 급격히 확장되었는데 새로 확장된 사고의 한계를 가늠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 모습, 이것이야말로 제가 대학에 기대했던 모습에 더 가까웠습니다. 원래는 정규 수업에서 이루어져야 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이후 몇 년간 저는 계속 나아갔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학부 졸업 논문으로 저는 SHRDLU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프로그램을 다루는 일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코드도 꽤 매력적이었지만 작업이 더욱 흥미로웠던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이미 지능의 초입에 도달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1985년에는 흔한 생각이었죠.

저는 코넬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학위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원하는 수업을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었고 학위에 원하는 전공명을 기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인공 지능"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위증에 전공명이 따옴표까지 포함되어 표기된 것을 확인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따옴표가 들어가니 마치 비꼬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꽤 신경이 쓰였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울 정도로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저는 곧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죠.

저는 세 곳의 대학원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AI 분야로 명성이 높았던 MIT와 예일대 그리고 리치 드레이브스가 다니고 있어서 방문해 봤던 하버드였습니다. 하버드는 제가 SHRDLU 클론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구문 분석기의 일종인 parser I을 고안한 빌 우즈(Bill Woods)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버드만이 저를 받아주었기 때문에 그리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특정한 순간이 존재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대학원 첫해에 당시의 AI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AI란 “강아지가 의자에 앉아 있다”라는 문장을 프로그램에 입력했을 때 이를 형식 표현(formal representation)으로 변환하여 프로그램의 사실 목록에 추가하는 방식의 AI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자연어의 한 부분집합이 형식 언어라는 사실을 실증합니다. 다만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부분집합입니다. 당시의 AI가 할 수 있는 일과 실제로 자연어를 이해하는 일 사이에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은 명백했습니다. 사실상 단순히 SHRDLU에게 더 많은 단어를 가르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명시적 데이터 구조를 사용하여 개념을 나타내는 AI 접근 방식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은 흔히 그러하듯 다양한 임시방편적 해결책을 주제로 하는 논문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는 마이크와 같은 인공지능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획이 무너진 상황에서 무언가 건질 수 있을지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거기에 Lisp이 있었습니다. 당시 Lisp이 각광받은 주요한 이유가 AI와의 연관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언어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Lisp에 집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Lisp 활용 기법에 대한 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집필을 시작했을 때 제가 Lisp 프로그래밍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떠올리면 겁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울 때 그것에 대한 책을 직접 쓰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책 『Lisp에 대하여(On Lisp)』는 1993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지만 대부분은 대학원 시절에 작성한 것입니다.

컴퓨터 과학은 이론과 시스템이라는 양대 축의 불편한 동행과도 같습니다.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증명하고 시스템을 다루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듭니다. 저는 무언가를 만드는 쪽에 끌렸습니다. 이론의 영역 역시 충분히 존중했습니다. 실은 두 영역 중 이론이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일이 훨씬 더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시스템 분야에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작성한 프로그램은 얼마나 훌륭한지와는 무관하게 길어봐야 몇십 년 안에 구식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소프트웨어를 각주에서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 작업물의 의미는 아주 희미해질 것입니다. 오직 해당 분야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만이 한때 훌륭했던 프로그램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컴퓨터 연구실에 여분의 Xerox Dandelion 컴퓨터들이 몇 대 있었습니다. 누구든 한 대 가져가서 시험 삼아 사용할 수 있었죠. 저도 잠깐 혹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 느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그 컴퓨터들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시스템 분야의 일이란 결국 그런 식이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오래도록 남을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 불만스러운 상태에서 저는 1988년에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리치 드레이브스를 만나러 CMU(카네기 멜런 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하루는 어릴 적 자주 시간을 보냈던 Carnegie Institute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림을 감상하던 중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제게는 상당히 놀라웠던 어떤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눈앞의 벽에 오래도록 지속되는 창작물이 걸려 있던 것입니다. 그림은 쓸모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그림들은 수백 년이 된 것이었죠.

게다가 그림은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근면하고 극도로 검소하게 살면 생계유지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술가로서 진정한 독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상사에게 보고할 필요도 연구 자금을 조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저는 늘 그림 감상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예술 작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창작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다거나 잡지 《라이프(Life)》에 등장하는 기묘한 작품을 만드는 신비로운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 그러니까 ‘예술 작품’이라는 명사 뒤에 ‘만들다’라는 동사를 둘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거의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해 가을에 하버드에서 미술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생은 어느 학과의 수업이든 수강할 수 있었고 제 지도교수이신 톰 치텀(Tom Cheatham)께서는 매우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제가 이상한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저는 컴퓨터 과학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도 예술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동시에 Lisp 프로그래밍에 진심으로 빠져 『Lisp에 대하여』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대학원생들이 그렇듯 학위 논문이 아닌 다른 여러 프로젝트에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을 관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1988년에 친구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인터넷 웜을 개발한 일로 코넬대학교에서 퇴학당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대학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그토록 극적인 방식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1990년 4월의 어느 날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치텀 교수님께서 제게 6월 졸업이 가능한 정도의 진척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논문은 한 단어도 쓰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때가 아마 제 인생에서 머리를 가장 빠르게 굴린 순간일 것 같습니다. 『Lisp에 대하여』의 일부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마감까지 남은 5주 정도 안에 논문을 한 번 완성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곤 지체 없이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며칠 후에 읽어보실 내용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논문의 주제로 컨티뉴에이션(Continuation)의 응용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크로와 내장 언어에 대해 썼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야에는 아직 탐구되지 않은 광대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저에게는 대학원을 마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급하게 쓴 논문으로 겨우 졸업 요건을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술 대학에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두 곳에 지원했는데 하나는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디 벨리 아르티(Accademia di Belli Arti)였습니다. 아카데미아는 가장 오래된 미술 대학이기 때문에 훌륭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RISD에서는 합격 통보를 받았고 아카데미아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Providence)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RISD의 학사 과정(BFA)에 지원했는데 이는 사실상 대학을 다시 다니는 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만큼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겨우 25살이었고 미술 대학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ISD에는 2학년 편입생으로 입학되었고 그해 여름 동안 기초 과정을 이수해야 했습니다. 기초 과정이란 모든 학생이 수강해야 하는 드로잉, 색채, 디자인과 같은 기본 과목을 다루는 수업을 의미합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아카데미아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가 아니라 잉글랜드의 케임브리지로 잘못 보내져 늦어진 것이었습니다. 편지에는 그해 가을 피렌체에서 치르는 입학시험 초대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험까지는 고작 몇 주 남짓 남아 있었습니다. 친절한 집주인아주머니께서 제 짐을 다락방에 보관해 주셨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컨설팅 일을 하며 모아둔 돈이 있었고, 검소하게 생활한다면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것뿐이었습니다.

오직 stranieri(외국인)만이 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시험은 외국인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피렌체에서 예술을 공부하고자 하는 외국인이 워낙 많아 이탈리아 학생들의 수가 열세에 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여름 RISD의 기초 과정을 들으며 회화와 드로잉은 제법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필기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세이 문제에서는 세잔에 대해 썼는데, 제한된 어휘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적 수준을 가능한 한 높이 끌어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2]

제 나이는 고작 25살이긴 하지만 어떠한 패턴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명망 있는 학문을 배우고자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입학하려 하고 있었고, 또다시 실망할 참이었습니다. 아카데미아의 회화과 학생들과 교수진은 이보다 더 다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교수들에게 아무런 가르침을 바라지 않았고 교수들 또한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19세기 아틀리에의 관습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희는 19세기 화실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땔감을 쓰는 작은 난로를 사용했습니다. 누드모델은 겨우 화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난로 가까이에 앉아 있었죠. 하지만 그녀를 그린 사람은 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은 수다를 떨거나 이따금씩 미국 예술 잡지에서 본 것을 흉내 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델은 알고 보니 저희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델 일과 지역 골동품 딜러를 위해 위작을 만드는 일을 병행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델이 책에 실린 잘 알려지지 않은 옛 그림을 모사하면 딜러가 그 모작을 일부러 손상시켜 오래되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3]

아카데미아에 재학 중일 때 밤마다 침실에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은 그림이었습니다. 방이 워낙 작았기도 했고 당시 형편으로 쓸 수 있는 건 남은 캔버스 조각들 뿐이었습니다. 정물화를 그리는 것은 인물화를 그리는 것과 다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물화의 대상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 번에 약 15분 이상 앉아 있을 수 없고 앉아 있는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인물화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사람을 그릴 줄 아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그리는 대상에 맞춰 구체적으로 수정해 나가는 형태입니다. 반면 정물화는 원한다면 보고 있는 대상을 픽셀 단위로 그대로 복사하듯 그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지점에서 멈추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사하는데 그친다면 그저 사진 같은 정확도만 남을 뿐이죠. 정물화는 사람의 머리를 거쳐 나올 때 비로소 흥미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색이 특정 지점에서 확 바뀌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 물체의 경계이기 때문임을 알려주는 시각적 단서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강세로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단지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정보 이론적 관점에서도 그렇습니다. [4]

저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을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습니다. 시각적 인식의 상당 부분은 저수준의 처리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은 "저건 물방울이야"정도만 뇌에 알려줄 뿐 물방울의 가장 밝고 어두운 지점이 어디인지 같은 세부 사항은 전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저건 덤불이야"라고 알려줄 뿐 모든 잎의 형태나 위치를 세세하게 전달하지 않습니다. 이는 뇌의 특징이지 결함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덤불의 모든 잎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는 것이 오히려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그리고자 할 때는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훨씬 많아지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대상을 며칠 내내 그리더라도 새로운 점을 계속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일반적으로 당연시하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기 위해 며칠을 공들인 후에도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그림을 그리는 유일한 방식은 아닙니다. 사실 좋은 방식인지조차 100%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울리비(Ulivi) 교수님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주셨고 학생마다 지니고 다니는 일종의 책자에 좋은 성적을 적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아에서는 이탈리아어 외에 배우는 것이 없었고 돈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첫 학년이 끝날 무렵에 저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RISD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저는 이제 빈털터리였고 RISD의 학비는 매우 비쌌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번 뒤 이듬해 가을 RISD에 복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인터리프(Interleaf)라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MS 워드 같은 걸 떠올리셨나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때 저는 보급형 소프트웨어가 고급형 소프트웨어를 잠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터리프는 아직까지는 몇 년 더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5]

인터리프는 꽤 굵직한 일을 해냈습니다. Emacs에서 영감을 받아 자체적으로 스크립팅 언어를 추가했고 그 스크립팅 언어를 Lisp 방언(dialect)으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인터리프에는 이 언어로 작업할 Lisp에 정통한 프로그래머가 필요했습니다. 이 일이 제가 경험한 것 중 가장 전형적인 직장 생활에 가까웠는데 여기서 저는 나쁜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상사와 동료들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들이 만든 Lisp은 거대한 C 케이크를 감싼 아주 얇은 아이싱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C 언어를 몰랐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심각하게 무책임했습니다. 당시 프로그래밍 직업군은 매일 출근하여 정해진 근무 시간을 채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런 근무 조건이 제게는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당시에는 마찰이 많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점차 저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에는 몰래 『Lisp에 대하여』를 집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맘때쯤 출판 계약을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좋았던 점은 큰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술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더 그렇습니다. 피렌체에서는 월세를 내고 나면 하루에 7달러로 모든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회의에 앉아 있기만 해도 시간당 4배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검소하게 생활한 덕분에 RISD로 돌아갈 비용을 충분히 모았을 뿐만 아니라 학자금 대출까지 갚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리프에서 몇 가지 유용한 점을 배웠습니다만 대부분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교훈이었습니다. 기술 회사는 영업 담당자보다는 제품 담당자가 운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물론 영업 역시 중요한 기술이며 잘하는 사람은 매우 뛰어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코드를 수정하면 버그가 생긴다는 것, 우울해지게 만드는 사무실은 값이 아무리 저렴해도 손해라는 것, 예정된 회의는 복도에서 나누는 대화만 못하다는 것, 관료적인 대기업 고객은 위험한 수익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통상의 근무 시간과 효율적인 프로그래밍에 적합한 시간, 통상의 사무 공간과 효율적인 프로그래밍에 적합한 공간 사이에는 별로 접점이 없다는 사실도 배웠죠.

하지만 제가 Viaweb과 Y Combinator에서도 적용했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보급형이 고급형을 잠식한다’는 것입니다. 즉 위상은 낮더라도 “입문용” 포지션에 위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당신을 시장의 정점에 몰아넣고 압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류라는 것이 곧 위험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해 가을에 RISD로 돌아갈 때 고객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팀과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협의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이후 몇 년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차 다시 회사에 방문했을 때 누군가 제게 HTML이라는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TML은 SGML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터리프에서는 마크업 언어 마니아들이 일종의 직업병처럼 흔했기에 저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 HTML이라는 것은 이후 제 삶의 큰 부분이 되었습니다.

1992년 가을, RISD에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프로비던스로 돌아왔습니다. 기초 과정은 거의 입문 수준의 내용에 불과했고 아카데미아는 (매우 세련되긴 했지만) 우스운 수준이었습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미술대학이 어떤 곳인지 경험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만 아아, 안타깝게도 아카데미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확실히 더 체계적이고 훨씬 비쌌지만 미술 대학과 미술의 관계는 의과대학이 의학과 맺고 있는 관계처럼 긴밀하지 않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졌습니다. 적어도 회화과는 그러했습니다. 제 옆집에 살던 학생이 속해 있던 섬유학과는 꽤 엄격해 보였습니다. 아마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건축 쪽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회화과는 이제 엄격함을 벗어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회화과 학생들은 자신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보다 세상 물정을 아는 학생들에게 그것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그니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시그니처 스타일이란 예술계에서 공연 업계의 "schtick(특유의 무대 루틴)"에 상응하는 시각적 요소를 말합니다. 즉 작품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당신의 것임을 즉시 식별할 수 있게 하는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이 특정 만화 같은 느낌을 준다면 그것이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화 같은 느낌의 큰 그림이 헤지펀드 매니저의 아파트에 걸려 있다면 매니저가 이 그림에 수백만 달러를 지불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시그니처 스타일을 갖는 이유가 항상 이 때문은 아니지만 구매자들이 시그니처 스타일이 있는 작품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보통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6]

진지한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림 좀 그리던” 아이들이 이제 전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미술 대학에 와서 더 나은 그림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이런 학생들은 RISD에서 마주한 현실에 혼란스럽고 낙담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정진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그림 좀 그리던 아이는 아니었습니다만 RISD에서는 확실히 시그니처 스타일을 찾는 부류보다는 그들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RISD에서 수강한 색채 수업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외에는 사실상 스스로 그림을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죠. 그래서 1993년에 중퇴했습니다. 잠시 프로비던스에 머무르고 있을 때 대학 친구인 낸시 파멧(Nancy Parmet)이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녀 어머니께서 소유한 뉴욕 건물의 임대 규제 아파트에 공실이 생긴 것입니다. 들어가고 싶었냐고요? 현재 살고 있는 집보다 그렇게 비싸지 않았고 뉴욕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제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습니다! [7]

만화 『아스테릭스(Asterix)』는 로마 제국이 갈리아(Gaul) 전역을 점령한 가운데,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갈리아의 아주 작은 마을을 확대해 보여주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뉴욕시 지도에서도 유사하게 해 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어퍼 이스트 사이드를 확대해 보면 부유하지 않은 작은 구역이 있습니다. 적어도 1993년 당시에는 부유하지 않았어요. 그곳이 요크빌(Yorkville), 바로 제 새 보금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뉴욕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뉴욕에 거주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돈 문제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인터리프가 하향세를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Lisp 관련 프리랜스 작업은 매우 드물었고 다른 언어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다른 언어라면 운이 좋아야 C++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돈 냄새를 쫓는 제 비범한 감각을 발휘해 Lisp에 대한 또 다른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에는 교재로도 사용될 수 있을만한 대중적인 책을 목표로 했습니다. 저작권료로 알뜰하게 생활하며 남은 시간을 모두 그림 그리는 데 쏟는 제 모습을 상상하면서요. (이 시기에 제가 그린 그림이 바로 『ANSI Common Lisp』 표지에 실린 그림입니다.)

뉴욕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이델 웨버(Idelle Weber)와 줄리언 웨버(Julian Weber)의 존재였습니다. 이델 웨버는 초기 포토리얼리즘 화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버드에서 그녀의 회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만큼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이 졸업 후에도 그녀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뉴욕으로 이사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사실상 스튜디오 조수가 되었습니다.

이델은 한 변의 길이가 4에서 5피트 정도 되는 큰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런 거대한 캔버스 괴물을 팽팽하게 펴며 씨름 중이던 1994년 말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유명한 펀드 매니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저보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왜 나는 부자가 되지 않지? 그러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라는 새로운 것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많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로버트 모리스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방문했을 때 그가 제게 웹을 보여주었습니다. 웹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마이크로컴퓨터의 대중화에 끼친 영향을 직접 본 저는, 웹도 인터넷에서 그와 비슷한 파급력을 가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바로 여기 다음 부자행 열차가 출발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선 맞았습니다. 틀렸던 것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저는 온라인 아트 갤러리를 창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수많은 Y Combinator 지원서를 읽어본 지금에서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최악의 스타트업 아이디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트 갤러리들은 온라인에 올라가길 원하지 않았고 특히 고급 갤러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갤러리의 웹사이트를 생성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로버트는 이미지 크기 조정과 페이지 호스팅을 위한 http 서버를 설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갤러리와 계약하려고 했습니다. 단순히 ‘설득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표현하기엔 한참 부족했습니다. 사실상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몇몇 갤러리에서 우리가 웹사이트를 만들어주는 것을 허락했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몇몇 온라인 스토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문 버튼만 제외하면 그 사이트들이 우리가 갤러리용으로 생성한 웹사이트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터넷 매장(internet storefront)"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것이 사실 우리가 이미 만들 줄 아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1995년 여름, 『ANSI Common Lisp』의 최종본 사본을 출판사에 제출한 뒤 우리는 온라인 스토어를 구축하는 소프트웨어 작성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당시 기준으로는 윈도용 소프트웨어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꽤나 우려스러웠습니다. 둘 다 윈도용 소프트웨어를 작성할 줄 몰랐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닉스(Unix)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닉스 기반의 프로토타입 스토어 빌더를 작성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로버트는 장바구니를 맡았고 저는 스토어용 새로운 사이트 생성기를 맡았습니다. 물론 Lisp으로 말이죠.

우리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작업했습니다. 로버트의 룸메이트가 자주 집을 비우는 덕분에 저는 룸메이트의 방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방엔 침대 프레임이나 시트 없이 매트리스만 바닥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매트리스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아침, 저를 대문자 L 모양으로 벌떡 앉게 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소프트웨어를 서버에서 실행하고 사용자가 링크를 클릭하는 방식으로 제어하게 하면 어떨까?’ 그러면 사용자의 컴퓨터에서 실행할 무언가를 따로 개발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웹사이트를 제공하는 바로 그 서버에서 사이트를 생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용자들은 브라우저만 있으면 됐죠.

이런 종류의 소프트웨어가 현재는 웹 앱(web app)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방식이 가능할지조차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브라우저를 통해 조작할 수 있는 스토어 빌더 버전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인 8월 12일에 작동하는 버전을 완성했습니다. 비록 UI는 형편없었지만 클라이언트 소프트웨어나 서버 명령줄에 입력하는 작업 없이, 브라우저만으로 전체 스토어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제야 정말로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 같은 감이 왔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소프트웨어에 대한 비전을 떠올렸습니다. 더 이상 버전이나 포트 따위의 골치 아픈 일들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터리프에서는 소프트웨어를 실제로 개발하는 팀만큼이나 규모가 큰 릴리즈 엔지니어링(Release Engineering) 부서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제는 서버에서 바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는 Viaweb이라는 새 회사를 출범했습니다. Viaweb은 우리 소프트웨어가 웹을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델의 남편 줄리언으로부터 1만 달러의 시드 펀딩을 받았습니다. 줄리언은 초기의 법률 업무도 처리해 주고 사업적 조언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줄리언에게 회사 지분 10%를 주었습니다. 이 거래가 10년 후에 Y Combinator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창업자들에게 이러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이 시점에서 제 순자산은 마이너스였습니다. 은행에 천 달러 정도의 예금이 있었지만 세금으로 정부에 빚진 금액이 이를 훨씬 초과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리프에서 컨설팅을 하며 벌었던 돈 중 적정 비율을 부지런히 따로 떼어 두었느냐고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는 대학원생 장학금을 받고 있었지만 저는 생계를 위해 그 시드 펀딩이 필요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9월 출시였으나 작업을 진행할수록 소프트웨어에 대한 목표가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WYSIWYG 사이트 빌더를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WYSIWYG은 페이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보는 페이지가 나중에 생성될 정적 페이지와 동일하게 보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다만 모든 링크는 서버의 해시 테이블에 저장된 클로저를 참조하도록 했기 때문에 실제로 정적 페이지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미술을 공부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스토어 빌더의 주요 목표는 사용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높은 제작 품질이 중요했습니다. 페이지 레이아웃, 글꼴, 색상을 제대로 설정하면 침실에서 운영하는 스토어도 대기업보다 더 신뢰감 있어 보이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제 사이트가 왜 이렇게 촌스러워 보이는지 궁금하시다면 여전히 이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투박해 보일 수 있지만 1996년에는 세련미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9월에 로버트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이나 됐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웃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거의 3년 후까지도 그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더 많은 프로그래머를 영입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에게 대학원 동기 중에서 정말 실력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트레버 블랙웰(Trevor Blackwell)을 추천했는데 처음에는 좀 의외였습니다. 당시 제가 트레버에 대해 아는 건 그가 늘 지니고 다니는 메모카드 한 묶음으로 삶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계획하려 한다는 점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롭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트레버는 무서울 정도록 유능한 프로그래머였습니다.

로버트랑 트레버와 함께 일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두 명이었는데 그 방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만약 롭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마 식민지 시대 뉴잉글랜드 교회처럼 보일 것입니다. 반면 트레버의 머릿속은 오스트리아 로코코 양식의 가장 극단적인 화려함을 닮았을 것입니다.

1996년 1월에 우리는 6개의 스토어와 함께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몇 달을 기다린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늦었다고 걱정했지만 사실 거의 치명적일 정도로 이른 타이밍이었거든요. 당시 언론에서는 전자상거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지만 실제로 온라인 스토어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8]

이 소프트웨어는 세 가지 주요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이트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에디터는 제가 만들었습니다. 장바구니는 로버트가, 주문과 통계를 관리하는 매니저는 트레버가 만든 것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에디터는 가장 훌륭한 범용 사이트 빌더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코드 구조를 간결하게 유지했고 로버트와 트레버의 소프트웨어 외에 다른 소프트웨어와의 통합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작업이 꽤 재미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해야 할 일이 이 소프트웨어 개발뿐이었다면 이후 3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평탄한 시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저는 프로그래밍보다 훨씬 못하는 다양한 일을 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그 3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였습니다.

90년대 후반에는 전자상거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MS 워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인터리프가 아니라요. 사용하기 쉬우면서도 저렴한 소프트웨어를 지향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난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Viaweb의 가격을 훨씬 낮게 책정할 수 있었으니까요. 작은 스토어에는 월 100달러, 큰 스토어에는 월 300달러를 청구했습니다. 이 낮은 가격이 큰 매력 요소였고 경쟁사들에게는 마치 손톱 밑의 가시 같은 골칫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격을 낮게 책정한 것은 어떤 영리한 통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기업들이 상품에 얼마나 지불하는지 전혀 감이 없었습니다. 월 300달러도 우리에게는 큰돈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런 식의 우연으로 많은 일을 제대로 해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소위 "확장되지 않는 일을 하라(doing things that don't scale)"라고 불리는 원칙을 실천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걸 "너무 형편없는 나머지 사용자를 확보를 위해 가장 절박한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라고 표현했을 겁니다. 그중 가장 흔한 방법은 사용자를 위해 직접 스토어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특히 굴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소프트웨어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람들이 스스로 스토어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용자를 확보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했습니다.

소매업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 셔츠의 이미지를 작은 크기로만 보여줄 수 있다면(그리고 모든 이미지는 지금 기준에서 보면 작았습니다), 셔츠 전체를 찍은 사진보다 칼라 부분을 클로즈업한 사진이 더 효과적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남성 셔츠 사진 30장가량을 다시 스캔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스캔했던 사진들도 정말 아름답게 나왔었는데 말이죠.

이런 일들이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정확히 옳은 일이었습니다. 사용자들을 위해 스토어를 만들어주면서 소매업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우리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경험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사업”이라는 것에 당혹감과 반감을 느꼈고 이를 담당할 "사업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가 생기기 시작하자 마치 아이를 낳고 나서 아버지로서의 마음가짐이 바뀌는 것처럼 제 태도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저는 전적으로 지원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너무 많은 사용자가 생겨 그들의 이미지를 대신 스캔해 줄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당시 몰랐던 또 하나의 사실은 성장률이 스타트업의 최종적인 시험대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성장률은 괜찮았습니다. 1996년 말에는 약 70개의 스토어가 있었고 1997년 말에는 약 500개로 늘어났습니다. 저는 절대적인 사용자 수가 핵심 지표라고 오판했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사용자 수도 중요합니다. 절대적인 수치가 곧 매출과 직결되고 매출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업을 지속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성장률이 절대적인 수치를 만회합니다. 만약 Viaweb이 Y Combinator에서 제가 조언하는 스타트업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잘하고 계시니까요. 1년에 7배씩 성장하고 있잖아요. 너무 많은 사람을 추가로 고용하지만 마세요. 그러면 곧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직원을 대거 채용했습니다. 투자자들의 요구도 있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닷컴 버블 당시 스타트업들이 흔히 그랬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원이 한 줌인 회사는 아마추어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결국 1998년 여름에 야후(Yahoo)가 우리를 인수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손익분기점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곧 회사의 전 생애 동안 투자자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투자자들 모두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초보자였기 때문에 스타트업 기준으로 평가해도 엉망이라고 할 만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야후가 우리 회사를 인수했을 때 정말 안도했습니다. 원칙상 Viaweb 주식은 가치 있었습니다. 수익성이 있고 빠르게 성장하는 사업의 지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게는 그리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은 전혀 몰랐지만, 회사가 생사의 기로에 서는 고통을 몇 달마다 너무나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업 이후로 대학원생 시절의 검소한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꾼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야후가 우리 회사를 인수했을 때는 마치 가난뱅이에서 부자로 변신한 기분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되었기에 저는 차를 한 대 샀습니다. 1998년형 노란색 VW GTI였죠. 차의 가죽 시트 하나만으로도 제가 소유한 것 중 가장 호화로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1998년 여름부터 1999년 여름까지의 1년은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생산성이 낮았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Viaweb을 운영하며 들인 노력과 받은 스트레스에 지쳐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뒤 한동안은 새벽 3시까지 프로그래밍을 하던 평소 루틴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피로와 야후의 조숙한 기업 문화, 산타클라라에 있는 암울한 칸막이 사무실은 점차 저를 쳐지게 만들었습니다. 몇 달 후에는 인터리프에서 일하던 때와 당황스러우리만치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야후가 우리 회사를 인수할 때 많은 스톡옵션을 제공했습니다. 당시 저는 야후의 주식이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아무 가치도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 주식은 그다음 해에 5배나 올랐습니다. 저는 첫 번째 스톡옵션이 확정될 때까지 버텼고 1999년 여름에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림을 그린 지 너무 오래되어 왜 이 모든 일을 시작했는지도 반쯤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제 머릿속은 온통 소프트웨어와 남성 셔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일이이었음을 스스로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그림을 그릴 차례였습니다.

야후를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제 계획에 대해 상사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의 종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드렸죠. 당시에는 그가 제게 그러한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는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제 스톡옵션은 매달 약 200만 달러의 가치에 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돈을 포기하고 떠날 만한 일은 새 스타트업 창업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제가 인재들을 데려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시는 닷컴 버블의 절정기였고 야후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제 상사는 그 시점에 억만장자였죠. 그런 시기에 스타트업을 차리겠다고 떠나는 것은 그에게는 터무니없으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가능하고 야심 가득한 계획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고 곧바로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미 부자가 되기 위해 4년을 허비한 상태였으니까요. 요즘 창업자들이 회사를 매각한 후 떠나겠다는 말을 들으면 제 조언은 항상 같습니다. "휴가를 가세요." 제가 했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 한 달에서 두 달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에너지나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산타크루즈 산맥에 있는 집을 사는 바람에 문제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집이었지만 외딴곳에 위치해 있었거든요. 몇 달 더 버티다가 결국 절박한 마음으로 뉴욕에 돌아갔습니다. 임대료 규제 정책을 모른다면 아마 놀라시겠지만, 예전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봉인된 제 아파트가 여전히 거기 남아 있었습니다. 적어도 뉴욕에는 이델이 있었고 거기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아무도 모른다고 할지라도요.

뉴욕으로 돌아온 후 저는 예전 삶으로 복귀했습니다. 이제 부자라는 사실은 다르지만요. 이상하게 들리는 만큼이나 실제로도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패턴이 예전과 똑같았지만 이전에는 없던 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제는 걷는 게 피곤해지면 손을 들어 (비만 오지 않는다면) 바로 택시를 탈 수 있었습니다. 매력적인 작은 레스토랑을 지나칠 때는 안으로 들어가 점심을 주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은 모든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림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형태의 정물화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먼저 기존 방식으로 한 점의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이를 사진으로 찍고 캔버스에 확대 출력해 두 번째 정물화의 밑그림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다음 같은 사물을 보고 다시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운 좋게도 그 정물들이 아직 썩지 않았다면 말이죠.)

한편으로는 구매할 아파트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살고 싶은 동네를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죠. 저는 스스로와 여러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뉴욕에서 케임브리지에 해당하는 곳은 어디일까?” 가끔 실제로 케임브리지를 방문하며 답을 구해봤지만 점차 그런 곳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

2000년 봄 즈음에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Viaweb에서의 경험을 통해 웹 앱이 미래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웹 앱을 만드는 웹 앱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브라우저를 통해 사용자들이 우리 서버에서 코드를 편집할 수 있게 하고, 결과물로 나온 애플리케이션을 우리가 호스팅해준다면?’ [9] 이렇게 하면 서버에서 다양한 종류의 서비스를 실행할 수 있고 애플리케이션들은 단순히 API 호출만으로 전화 걸기 및 받기, 이미지 조정, 신용카드 결제 처리 같은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디어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미래라는 사실이 자명해 보였습니다. 또다시 회사를 창업하고 싶었던 것은 딱히 아니었지만 이 아이디어는 반드시 회사 형태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로 이사해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로버트를 설득해 함께 일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로버트는 이제 MIT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그를 제 아이디어에 끌어들여 많은 돈을 벌게 해 주긴 했지만 그것이 엄청난 시간 소모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이 아이디어가 타당해 보인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함께 일하겠냐는 제안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흠. 그렇다면 혼자 해내야겠죠. Viaweb에서 근무했던 댄 기핀(Dan Giffin)과 여름 단기직을 원하던 두 명의 학부생을 영입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지금 돌이켜보면 수십 개의 기업과 여러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방대한 소프트웨어였습니다. 애플리케이션 정의에 쓰일 언어는 당연히 Lisp의 방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반 대중에게 노골적으로 Lisp을 들이밀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괄호를 숨기기로 했습니다. Dylan이 했던 것처럼요.

그때쯤 Viaweb과 같은 유형의 회사를 이르는 말이 생겼습니다. 바로 "애플리케이션 서비스 제공업체(application service provider)" 또는 ASP였습니다. 이 명칭은 오래가지 않아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oftware as a service)"로 대체되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기에 저는 새 회사 이름을 여기에서 따오기로 했습니다. 그 이름은 Aspra입니다.

저는 애플리케이션 빌더 개발에 착수했고 댄은 네트워크 인프라를, 두 명의 학부생은 최초 두 개 서비스(이미지와 전화)를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반쯤 지났을 때 제가 정말로 회사를 운영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규모가 있는 회사는 더욱이 맡고 싶지 않았는데 이 프로젝트는 큰 회사로 성장해야 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Viaweb은 오직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작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돈이 필요하지 않은데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회사를 세워야 한다면 그 비전 따위 집어치우겠습니다. 저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로 실현할 수 있도록 서브셋만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놀랍게도 Aspra에 쏟았던 시간은 전혀 헛되지 않았습니다. Y Combinator를 시작한 후로 저는 이 새로운 아키텍처의 일부를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들을 종종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구조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실제로 일부를 작성해보려 했던 경험이 아주 유용하게 작용했습니다.

오픈 소스 프로젝트로 만들기로 한 서브셋은 새로운 Lisp이었습니다. 이제는 괄호조차 숨길 필요가 없었죠. 많은 Lisp 프로그래머들은 새로운 Lisp을 만드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언어가 방언을 갖는다는 독특한 특징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가 내심으로 모든 기존 방언들을 미흡하게 만드는 플라톤적 이상형의 Lisp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확실히 그랬거든요. 그래서 여름이 끝날 무렵에 저는 케임브리지에 마련한 집에서 댄과 함께 제가 Arc라고 부르는 새로운 Lisp 방언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지는 봄에 벼락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Lisp 콘퍼런스에서 발표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고, Viaweb에서 Lisp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발표 후 이 내용을 포스트스크립트 파일로 만들어 몇 년 전 Viaweb으로 만들어둔 paulgraham.com에 올렸습니다. 한동안 아무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았던 사이트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30,000회의 페이지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유입 URL을 확인해 보니 누군가 이 글을 Slashdot에 올렸던 것입니다. [10]

‘와, 독자가 있구나’ 싶었어요. 내가 무언가를 써서 웹에 올리면 누구든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인쇄 매체 시대에는 독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그 경로엔 편집자라고 불리는 사나운 괴물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쓴 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면 책이나 신문, 잡지 같은 매체에 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나 무엇이든 출판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1993년부터 가능했지만 당시에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 대부분의 시간 내내 웹 인프라 구축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동시에 글을 쓰는 사람이었던 저조차도 이를 깨닫는 데 8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음 이후에도 이 사실이 가진 함의를 이해하는 데 몇 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에세이의 출현을 의미했습니다. [11]

인쇄 매체 시대에는 에세이를 출판할 수 있는 경로가 극도로 제한적이었습니다. 뉴욕의 특정 파티에 참석하며 공식적으로 선택받은 사상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문가가 자기 분야의 전문 지식에 대해서만 에세이를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 경로가 없어서 쓰이지 못한 에세이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그런 에세이들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저도 에세이를 쓸 작정이었습니다. [12]

여러 가지 일을 해왔는데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깨달은 전환점이 제게 있었다면, 온라인에 에세이를 게시하기 시작한 순간이 바로 그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에세이 쓰는 것도 늘 함께하게 될 것임을 알았거든요.

온라인 에세이가 처음에는 주변 매체로 여겨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온라인 에세이는 《뉴요커(The New Yorker)》에 실린 품위 있고 아름답게 조판된 글보다는, GeoCities 사이트에 미치광이들이 게시한 불평불만에 더 가까워 보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 시점에서 저는 좌절하기보다는 힘을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은 것을 배운 상태였습니다.

제 삶에서 알아차린 가장 눈에 띄는 패턴 중 하나는 ‘명성이 없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잘 맞아떨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요. 정물화는 항상 회화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상을 차지하는 장르였습니다. Viaweb과 Y Combinator 역시 시작할 때는 허접해 보였습니다. 무엇을 쓰는지 묻는 낯선 이들에게 제 웹사이트에 실릴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설명하면 지금도 공허한 눈빛을 받곤 합니다. 심지어 Lisp도 라틴어처럼 지적으로는 명망이 있더라도 그다지 힙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명성이 없는 일이 그 자체로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명성이 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끌린다면, 그것은 그곳에 발견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신호이자 당신의 동기가 올바르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위험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당신을 가장 잘못된 길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성이 없는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가장 흔한 유형의 잘못된 길은 피하고 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많이 썼습니다. 오라일리(O'Reilly)에서 에세이 모음을 『해커와 화가(Hackers & Painters)』라는 책으로 재출간했는데, 모음집에 수록된 동명의 에세이에서 제목을 따온 것입니다. 또한 스팸 필터 작업을 했고 그림도 더 그렸습니다. 매주 목요일 밤엔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모임 요리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에 또 다른 건물을 구매했습니다. 한때 사탕 공장이었던 (소문에 따르면 이후에 포르노 스튜디오로도 사용된 적이 있는) 건물이었는데 사무실로 쓰기 위해 샀습니다.

2003년 10월 어느 날 밤에 제 집에서 큰 파티가 있었습니다. 목요일 저녁 모임에 참석하던 친구인 마리아 다니엘스(Maria Daniels)가 떠올린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세 명의 서로 다른 주최자가 각자의 친구들을 한 파티에 초대하는 방식이었죠. 그래서 각 손님에게 다른 손님 셋 중 둘이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아마 마음에 들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 손님 중에는 제가 알지 못했지만 곧 아주 좋아하게 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제시카 리빙스턴(Jessica Livingston)이었고 며칠 후 저는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제시카는 보스턴의 한 투자은행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은행은 스타트업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 동안 제시카가 제 스타트업 세계 친구들을 만나면서 실제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다채로운지도요. 그래서 제시카는 스타트업 창업자들과의 인터뷰를 엮어서 책을 출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은행이 재정 문제를 겪으면서 그녀가 직원 절반을 해고해야 했을 때 제시카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2005년 초에 그녀는 보스턴의 한 벤처 캐피털 회사 마케팅 직책에 면접을 보았습니다. 회사 측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몇 주가 걸렸고, 그 사이에 저는 벤처 캐피털에서 개선되어야 할 모든 점에 대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소수의 거대 투자보다는 더 많은 수의 소규모 투자를 해야 한다, MBA 출신이 아니라 젊고 기술적인 창업자를 지원해야 한다, 창업자들이 CEO로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등등의 이야기였습니다.

에세이를 쓰는 요령 중 하나로 항상 강연을 활용해 왔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서 그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유익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학부 컴퓨터 동아리인 하버드 컴퓨터 학회(Harvard Computer Society)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창업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이 우리가 겪었던 최악의 실수들은 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그리하여 하버드에서 강연하던 도중에 저는 성공한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가장 좋은 시드 펀딩의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금뿐만 아니라 조언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모두가 제게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듯했습니다. 받은 편지함에 사업 계획서 이메일이 폭발할 것을 떠올리니 끔찍한 마음에, (제가 그때 무엇을 알았겠습니까만은) "하지만 저한테는 안 됩니다!"라고 얼버무린 후 강연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강연 후 저는 정말로 에인절 투자를 더는 미루지 않고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후가 우리 회사를 인수한 후로 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었는데 벌써 7년이 흘렀고, 여전히 단 한 건의 에인절 투자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버트, 트레버와 함께할 프로젝트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던 시절이 그리웠고 함께 협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3월 11일 저녁, 제시카와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던 중 가든 스트리트(Garden Street)와 워커 스트리트(Walker Street) 모퉁이에서 이 세 가지 아이디어가 하나로 수렴되었습니다. 결정에 한세월이 걸리는 벤처 캐피털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직접 투자 회사를 설립하여 이야기했던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금을 조달하고, 제시카는 직장을 관두고 여기서 일하며, 로버트와 트레버도 파트너로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13]

다시 한번 무지함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우리는 에인절 투자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2005년의 보스턴에는 론 콘웨이(Ron Conway)처럼 배울 만한 롤모델도 없었죠. 그래서 그저 명백히 옳아 보이는 선택을 했고 그중 일부는 아주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Y Combinator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한 번에 알아낸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파악한 부분은 에인절 투자 기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에인절 투자와 기업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지 않았습니다. 벤처 캐피털 기업은 조직화된 회사로,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통 수백만 달러 단위의 대규모 투자만 했습니다. 반면 에인절 투자자는 소규모 투자를 했지만 대부분 다른 일에 주력하면서 부업으로 투자를 하던 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둘 다 초기 단계의 창업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창업자들이 특정 측면에서 얼마나 무력한 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줄리언이 우리를 위해 마치 마법처럼 회사 설립을 도와준 일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꽤나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데는 능숙했지만, 실제로 법인 설립을 하고 정관을 작성하며, 주식을 발행하는 과정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단순히 시드 투자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줄리언이 우리를 위해 해줬던 모든 것을 창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YC는 펀드로 조직되지 않았습니다. 운영 비용이 충분히 저렴했기 때문에 우리 돈으로 자금을 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99%의 독자들은 그냥 지나쳤겠지만 전문 투자자라면 "와, 그 말은 수익을 전부 가져갔다는 뜻이잖아"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떤 특별한 통찰력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벤처캐피털 기업이 어떻게 조직되는지 몰랐습니다. 펀드를 조성하려는 시도조차 해본 적 없었고 설령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 [14]

YC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배치(batch) 모델입니다. 연 2회 여러 스타트업에 한 번에 투자하고, 각 배치마다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지원합니다. 이 모델은 단순히 어떤 무의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투자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지함에 따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투자자로서의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에 여러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죠. 우리는 대학생들이 여름 동안 기술 회사에서 단기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름 프로그램을 조직해서 그들이 스타트업을 시작하도록 하면 어떨까? 우리가 가짜 투자자라는 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가짜 창업자일 테니까요. 그래서 아마 이 프로그램으로 큰돈을 벌기는 어려울 테지만, 최소한 투자자로서 연습을 해볼 수 있을 것이고 학생들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케임브리지에 소유한 건물을 본부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매주 한 번 본부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이미 목요일에는 모임을 위해 요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주 화요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스타트업 전문가들을 초빙해 강연을 듣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학부생들이 여름 단기직을 결정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며칠 만에 “여름 창업자 프로그램(SFP)”을 급히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제 웹사이트에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지원을 초대하는 공지를 게시했습니다. 에세이를 쓰는 일이 투자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딜 플로우(deal flow)"를 얻는 방법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게 오히려 완벽한 공급원이 되었습니다. [15] 여름 창업자 프로그램에 총 225개의 지원서가 접수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이미 졸업했거나 해당 봄에 졸업을 앞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벌써부터 이 SFP라는 프로그램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225개 팀 중 약 20팀을 초청해 직접 면접을 진행했고, 그중 8개 팀을 선발하여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상당히 인상적인 그룹이었습니다. 첫 배치에는 reddit, 훗날 Twitch를 설립한 저스틴 칸(Justin Kan)과 에밋 시어(Emmett Shear), 이미 RSS 사양 작성에 기여했고 몇 년 뒤에 오픈 액세스 운동의 순교자가 된 애런 스워츠(Aaron Swartz), 그리고 후에 YC의 두 번째 사장이 된 샘 알트만(Sam Altman)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배치가 이토록 뛰어난 것은 단순히 운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골드만삭스 같은 신뢰도 높은 회사에서의 여름 인턴십 대신, ‘여름 창업자 프로그램’이라는 기묘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결정을 내리려면 상당히 대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에 제공한 투자 조건은 줄리언과 했던 거래(1만 달러에 지분 10%)와 MIT 대학원생들이 여름에 받는 금액이라는 로버트의 정보(6천 달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창업자 1인당 6천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두 명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팀의 경우 1만 2천 달러에 해당하며 그 대가로 지분 6%를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직접 경험했던 조건보다 두 배 더 나은 조건이었으니 분명 공정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첫 번째 여름은 매우 더웠던 터라 제시카는 창업자들에게 무료로 에어컨까지 제공했습니다. [16]

꽤 이른 시점에 우리가 스타트업 펀딩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배치 단위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방식은 우리에게도 편리했습니다. 여러 스타트업을 한 번에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치의 일원이 되는 것은 스타트업들에게도 더 나은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창업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고립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제 창업자들은 단순히 동기가 아니라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조언을 나눌 수 있는 동료를 얻게 된 것입니다.

YC가 성장하며 규모가 커짐에 따라 나타나는 다른 장점들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졸업생들은 서로를 돕는 데 헌신적인 끈끈한 커뮤니티를 형성했으며, 특히 현재 배치에 속한 창업자들을 돕는 데 열정적이었습니다. 자신들도 한때 같은 위치에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또한 스타트업들이 서로의 고객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농담 삼아 "YC GDP"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YC가 성장함에 따라 이 표현은 점점 더 농담처럼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많은 스타트업들이 초기 고객을 거의 전적으로 배치 동료들 사이에서 확보하고 있습니다.

YC를 처음 시작할 때 저는 이것이 전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 가지 일을 병행하려고 했었죠. 프로그래밍, 에세이 작성, 그리고 YC 말이에요. 그러나 YC가 성장하고 제가 점점 더 이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제 관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몇 년간은 여전히 다른 일들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2006년 여름에 로버트와 저는 Arc의 새 버전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버전은 Scheme으로 컴파일하기 때문에 꽤 빠르게 동작했습니다. 새로운 Arc를 테스트하기 위해 제가 만든 것이 바로 Hacker News(HN)입니다. 원래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위한 뉴스 집계 사이트로 이름도 Startup News였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스타트업 관련 기사만 읽는 것에 싫증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도달하고자 했던 대상은 현재의 창업자가 아니라 미래의 창업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Hacker News로 바꾸고 주제도 단순히 스타트업에 국한하지 않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분야로 확장했습니다.

HN은 분명 YC에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창업자를 선정하고 지원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제 삶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이는 HN이 실수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천은 최소한 그 일의 핵심에 가까워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마치 마라톤을 뛰면서 달리기의 고통이 아니라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생긴 물집으로 고통받는 것과 같았습니다. YC를 운영하며 긴급한 문제를 처리해야 할 때면, HN 관련 문제인 경우가 거의 60%였고 나머지 모든 일을 합친 비율이 40%였습니다. [17]

HN과 마찬가지로 YC의 내부 소프트웨어도 모두 Arc로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Arc’로’ 많은 작업을 계속하긴 했어도 점차 Arc’의’ 개발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했던 이유도 있었고 이미 Arc에 의존하는 기반 구조가 자리 잡은 상태에서 언어를 다듬는 작업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 가지 프로젝트는 이제 두 가지로 줄어들었습니다. 에세이 작성과 YC에 집중하게 된 것이죠.

YC는 제가 해왔던 다른 일들과는 달랐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대신 문제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6개월마다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배치되었고 그들이 겪는 문제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곧 우리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문제들이 매우 다양했으며 뛰어난 창업자들은 굉장히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스타트업에 대해 가장 많이 배우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일 중에는 싫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공동 창업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누군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거나, 스타트업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일 따위의 업무들이었죠. 하지만 그런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케빈 헤일(Kevin Hale)이 회사에 대해 했던 말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이 말을 묘사적 차원과 규범적 차원 모두로 사용했는데, 후자의 의미가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YC를 훌륭한 조직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제가 일하는 강도가 다른 모두의 상한선을 결정한다면 저는 정말 열심히 일해야만 했죠.

2010년의 어느 날에 인터뷰를 위해 캘리포니아를 방문 중이던 로버트 모리스가 아주 놀라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가 제게 먼저 조언을 건넨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딱 한 번 그랬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Viaweb 시절 제가 신장 결석으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어느 날, 저를 병원에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롭이 먼저 조언을 한다는 것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의 말을 아주 정확히 기억합니다. “알잖아, 너 Y Combinator가 네가 하는 멋진 일 중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해.”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Y Combinator를 그만둬야 한다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YC는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조언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롭이 조언을 하는 것만큼 드문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롭이 틀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의 궤도로 가면 YC가 제가 하는 마지막 일이 될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었습니다. YC는 이미 제 관심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Arc를 삼켰고, 에세이도 잠식해가고 있었습니다. YC를 제 인생의 전부로 삼을 게 아니면 결국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떠나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012년 여름, 어머니께서 뇌졸중을 겪으셨고 원인은 대장암에서 비롯된 혈전이었습니다. 뇌졸중으로 인해 어머니의 균형감각이 망가졌고 요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제 여동생과 저는 어머니를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오리건으로 정기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어머니를 방문했고 비행 중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YC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시카에게 YC의 대표가 되고 싶은지 물었는데 그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샘 올트먼(Sam Altman)을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로버트, 트레버와 논의한 끝에 YC를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바꾸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때까지 YC는 우리가 창립한 유한책임회사(LLC)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YC가 오랜 기간 지속되기 위해서는 창립자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샘이 승낙하면 YC의 재편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로버트와 저는 은퇴하고 제시카와 트레버는 일반 파트너가 되기로 했습니다.

샘에게 YC 대표직을 맡아줄 수 있는지 묻자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원자로를 만드는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설득했고 결국 2013년 10월에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2014년 겨울 배치부터 샘이 YC를 맡기로 했습니다. 남은 2013년 기간 동안 YC 운영을 조금씩 샘에게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일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암이 재발한 어머니께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2014년 1월 15일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런 일이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3월까지 YC 업무를 이어가며 해당 배치의 스타트업들이 데모 데이(Demo Day)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나서, 저는 거의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제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일하는 신생 스타트업이나 YC 졸업생들과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한 주에 몇 시간 정도입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롭의 조언에는 이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었기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전적으로 집중하면 얼마나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YC 업무를 마친 바로 다음 날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쉬었던 탓에 실력이 녹슬었었고 다시 감각을 되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림은 저를 완전히 몰입하게 해 주었습니다. [18]

2014년의 대부분을 그림을 그리며 보냈습니다. 이렇게 방해받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던 건 처음이었고 이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1월에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의욕이 바닥났습니다. 그전까지는 작업 중인 그림이 어떻게 완성될지 늘 궁금했지만 갑자기 그림을 끝내는 일이 그저 고역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멈추고 붓을 정리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요.

꽤 나약하게 들릴 것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주의력은 제로섬 게임입니다. 만약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아니면 적어도 괜찮은) 프로젝트가 아닌 것을 선택한다면, 그 프로젝트는 진정 중요한 다른 프로젝트에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50살이 되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데 기회비용이 따르죠.

저는 다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고 몇 달 동안 새로운 글을 여러 편 썼습니다. 그중에는 스타트업과 무관한 글도 몇 편 있었습니다. 그러다 2015년 3월에 다시 Lisp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Lisp의 독특한 점은 Lisp의 코어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인터프리터를 작성함으로써 정의되는 언어라는 점입니다. 애초에 일반적인 의미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튜링 기계에 대한 대안으로써 계산의 형식적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언어를 스스로를 통해 해석하는 인터프리터를 작성하고자 한다면,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연산자는 무엇일까요? 존 매카시(John McCarthy)가 발명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발견한 Lisp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입니다. [19]

매카시는 자신이 만든 Lisp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의 대학원생이었던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이 이를 제안했죠. 러셀은 매카시의 인터프리터를 IBM 704의 기계어로 번역했고, 그때부터 Lisp은 일반적인 의미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계산 모델로서의 기원은 다른 언어들이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함과 우아함을 Lisp에 부여했습니다. 대학 시절 제가 Lisp에 매료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지만 당시에는 왜 그런지 잘 몰랐습니다.

매카시가 1960년에 개발한 Lisp은 Lisp 표현식을 해석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필요한 많은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추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추가된 요소들은 기존의 매카시의 공리적 접근 방식으로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매카시는 프로그램 실행을 수작업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자신의 인터프리터를 테스트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테스트할 수 있는 인터프리터의 한계에 이미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인터프리터에는 매카시가 간과했던 버그가 있었습니다. 더 복잡한 인터프리터를 테스트하려면 컴퓨터에서 실행해야 했지만 당시의 컴퓨터는 그만큼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매카시의 공리적 접근 방식을 계속 사용하면서도 완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카시의 Lisp에 가한 모든 변화가 발견적 속성을 유지하는 변환이라면, 이론적으로는 이 품질을 가진 완전한 언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래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2015년 3월 26일부터 2019년 10월 12일까지 총 4년이 걸렸습니다.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계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Lisp의 이름은 Bel이고 Arc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으로 작성된 언어입니다. 모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사용한 속임수의 일환이었습니다. 수많은 다양하고 특출 난 기법들을 동원하여 자체적으로 작성된 인터프리터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테스트하기에는 충분히 빨랐습니다.

Bel 작업을 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에세이 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Bel을 끝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15년 말, 3개월가량 에세이를 쓰다가 다시 Bel 작업으로 돌아갔을 때는 코드를 거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코드가 엉망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문제 자체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자체적으로 작성된 인터프리터를 작업할 때는 각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으며 에러는 시간이 지나며 사실상 암호화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Bel 작업이 끝날 때까지 에세이는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만 Bel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실제로는 제가 해본 일 중 가장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끔찍한 버그와 몇 시간 동안 씨름한 후 때때로 트위터나 Hacker News를 확인하면, 누군가가 "폴 그레이엄은 아직 코딩을 할까?"라고 묻는 글을 보곤 했습니다.

Bel 작업은 힘들었지만 만족스러웠습니다. 작업에 몰두한 덕분에 코드의 상당 부분을 머릿속에 기억하면서 더 많은 코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2015년 어느 화창한 날에 아이들을 해안가로 데려가 조개 웅덩이에서 노는 모습을 보며 컨티뉴에이션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진기한 감정이었는지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요. 다행히 그 이후 몇 년 동안 그런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2016년 여름, 우리 가족은 영국으로 이사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생적으로 영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1년만 머물 계획이었지만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도 영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Bel의 대부분은 영국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19년 가을에 마침내 Bel이 완성되었습니다. 매카시의 초기 Lisp과 마찬가지로 Bel도 구현보다는 사양에 가깝습니다. 매카시의 Lisp처럼 코드로 표현된 사양입니다.

이제 다시 에세이를 쓸 수 있게 되면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주제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2020년 내내 에세이 쓰는 것을 이어가는 동시에 다른 작업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과거에 내가 작업 주제를 선택했던 방식은 어땠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한 에세이를 썼는데 그 답이 얼마나 길고 복잡했는지 보고 놀랐습니다. 이 삶을 살아온 저조차 놀랐다면 비슷하게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흥미롭고 격려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더 자세한 버전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글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주석

[1] 저는 컴퓨터 발전 과정에서 시분할 시스템과 대화형 운영체제 단계를 건너뛰고 경험했습니다. 일괄 처리 방식에서 바로 마이크로컴퓨터로 넘어갔기 때문에 마이크로컴퓨터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2] 이탈리아어의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거의 항상 영어의 동계어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polluzione 같은 함정은 드물게 예외지만요). 오히려 일상적인 단어들이 더 상이합니다. 따라서 몇 가지 단순한 동사에 여러 추상적 개념을 조합하면 약간의 이탈리아어만으로도 꽤나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3] 저는 피아차 산 펠리체 4에 살았기 때문에 아카데미아까지 가는 길은 피렌체 구시가지의 중심을 따라 곧장 이어지는 경로였습니다. 피티 궁전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오르산미켈레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두오모와 세례당 사이를 지나 비아 리카솔리를 따라 피아차 산 마르코까지 갔습니다. 겨울밤의 어두운 빈 거리부터 무더운 여름날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까지, 피렌체 거리의 모든 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4] 물론 원한다면, 그리고 모델이 기꺼이 응한다면 사람도 정물처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 초상화는 정물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시간 앉아 있다 보면 모델의 표정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드러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5] 인터리프는 똑똑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인상적인 기술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어의 법칙에 의해 몰락한 많은 회사 중 하나였습니다. 1990년대 들어 일반 상용 하드웨어(예: 인텔 프로세서)의 성능이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면서 고급 맞춤형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불도저처럼 쓸려 나갔습니다.

[6] RISD에서 시그니처 스타일을 추구하는 학생들이 유독 상업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술계에서는 돈과 멋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비싼 것은 멋있게 여겨지기 마련이고 마찬가지로 멋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곧 비싸질 것입니다.

[7] 엄밀히 말하면 그 아파트는 임대 규제가 아니라 임대 안정화 정책의 대상이었지만 이는 뉴요커들만 알고 신경 쓰는 세부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핵심은 정말 저렴했다는 것입니다. 시세의 절반 이하 가격이었죠.

[8]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개발이 완료되자마자 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온라인 스토어 빌더이고 당신이 그 스토어들을 호스팅하는 경우라면, 사용자가 아직 전혀 없는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식 출시 전에 초기 사용자 그룹을 모집하고 그들이 괜찮아 보이는 스토어를 갖출 수 있도록 검토하는 ‘비공개 출시’를 먼저 진행해야 했습니다.

[9] Viaweb에는 사용자가 자신의 페이지 서식을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 에디터가 있었습니다. 사용자들은 알지 못했지만 물밑에서 Lisp 표현식을 편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앱 에디터는 아니었습니다. 코드가 실행되는 시점은 판매자들의 사이트가 생성되는 시점이지 쇼핑객들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0] 이것이 지금은 익숙해진 경험의 첫 번째 사례였고 곧이어 일어난 일 역시 그랬습니다. 댓글을 보니 분노에 찬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Lisp이 다른 언어보다 낫다고 주장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모든 언어는 튜링 완전하지 않나요?" 제가 쓴 에세이에 대한 반응을 본 사람들이 종종 저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저는 처음부터 줄곧 이런 반응에 익숙하다고 말해 왔고 그건 과장이 아닙니다. 이런 반응은 글쓰기에 따라오는 숙명입니다. 에세이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을 전달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11] 물론 90년대에도 사람들은 인터넷에 이것저것 많이 올렸습니다. 하지만 온라인에 무언가를 올리는 것과 온라인에서 출판하는 것은 다릅니다. 온라인 출판이란 온라인 버전을 주요한 버전으로 (아니면 최소한 그중 하나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2] 여기에 Y Combinator와의 경험에서도 배울 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관습은 그것을 초래했던 제약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여전히 우리를 억압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벤처캐피털(VC)의 관행은 마치 에세이 출판 관행처럼 실제 제약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만큼 드물었습니다. 이제 스타트업 창업은 저렴해졌고 흔해졌지만, VC의 관행은 여전히 과거의 세상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에세이를 쓰는 관행이 여전히 출판 시대의 제약을 반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로부터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즉 관습의 영향을 덜 받는 사람들)이 (관습이 시대에 뒤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유리하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어떤 분야가 급격한 변화의 영향을 받을지 항상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나 벤처 캐피털은 분명히 그러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에세이 집필이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13] 원래부터 Y Combinator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Cambridge Seed였습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누군가가 우리를 모방할 경우를 상정하여 지역 이름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람다 계산법의 가장 멋진 기법 중 하나인 Y 컴비네이터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저는 주황색을 우리의 색상으로 선택했습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상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어떤 벤처캐피털도 사용하지 않던 색상이었기 때문입니다. 2005년의 벤처캐피털들은 모두 밤색, 남색, 짙은 녹색 같은 점잖은 색상만 사용했는데, 이는 창업자들보다는 유한 파트너(LPs)들에게 어필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YC 로고 자체도 우리끼리의 농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Viaweb 로고는 빨간 원 안에 하얀색 V가 있었는데, YC 로고는 주황색 사각형 안에 하얀색 Y를 넣어 이를 패러디한 것이었습니다.

[14] YC는 2009년부터 몇 년간 펀드로 운영되었습니다. 규모가 너무 커져서 제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Heroku가 인수된 후에는 다시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5] 저는 "딜 플로우"라는 용어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는 특정 시점에 신생 스타트업의 수가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이 아닐뿐더러 YC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을 스타트업들이 출범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여 그 암시가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 제시카는 당시 창업자들에게 제공했던 에어컨이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었던 이유로 에어컨 수요가 급증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그녀는 그 에어컨들을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17] HN의 또 다른 문제는 에세이를 쓰면서 포럼도 운영할 때 발생하는 기이한 에지 케이스였습니다. 포럼을 운영하면 적어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대화를 확인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에세이를 쓰면 사람들이 포럼에서 그 에세이를 매우 창의적으로 오해한 해석들을 게시합니다. 개별적으로는 이 두 현상이 지루하지만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둘이 결합되면 재앙이 됩니다. 오해들에 반드시 답변해야만 했습니다. 운영자로서 자신의 글의 논쟁을 인지했다고 여겨지는 상황인데 충분히 추천을 받은 오해에 대해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묵시적 인정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응하면 오히려 더 많은 논쟁을 유도합니다. 누군가 당신과 싸우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니까요.

[18] YC를 떠나며 가장 아쉬웠던 점은 더 이상 제시카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알고 지낸 거의 모든 시간 동안 YC를 함께 운영해 왔습니다. YC와 사적인 삶을 분리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YC를 떠나는 일은 마치 깊이 뿌리내린 나무를 뽑아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19] 발명과 발견이라는 개념을 더 명확히 하려면 외계 생명체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충분히 고도로 발달한 외계 문명이라면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확실히 높습니다. 저는 매카시가 1960년 논문에 제시한 Lisp 역시 외계 생명체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피타고라스 정리만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외계 생명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여기까지 일 것이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추측하건대 외계 생명체도 숫자, 오류, 입출력(I/O) 같은 요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매카시의 Lisp에서 출발해 발견성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는 경로가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 글의 초안을 검토해준 트레버 블랙웰(Trevor Blackwell), 존 콜리슨(John Collison), 패트릭 콜리슨(Patrick Collison), 다니엘 개클(Daniel Gackle), 랄프 헤이젤(Ralph Hazell), 제시카 리빙스턴(Jessica Livingston),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그리고 하르지 태거(Harj Taggar)에게 감사드립니다.